찬송 : ‘예수가 함께 계시니’ 325장(통 325)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39장 1~4절
말씀 : 안타까운 우리의 자화상이 있습니다. 자살률 세계 1위.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졌음에도 마음 한 켠을 그늘지게 하는 현실입니다. 무엇이 수많은 생명을 사지로 몰아가게 했을까요. 대표적인 이유 중에 하나로 우리 사회가 실패를 부끄러워하고 감추려는 분위기의 문화라는 겁니다.
성경은 다양한 하나님의 사람들 이야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들려줍니다. 좋은 것만 모아 놓은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한 실패와 실수, 연약함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가 저지른 실패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는 비겁하기까지 했습니다. 믿음의 원조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이삭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드러내고 있는 편애의 문제는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어떠한가요.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세속주의적 사고를 가진 전형적 인물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세상적 부와 성공을 거둔듯해도 그에게서 벌어진 실패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부부의 관계가 틀어졌고 자녀들은 탈선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급기야는 서로 살인하며 거짓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요셉의 인생도 그가 거친 과정들은 절대로 성공의 길이 아니라 실패와 실수 절망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실패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의 인격에 손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실패의 과정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셉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요셉의 시작은 실패의 자리였습니다. 이보다 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장 2절)
조금 이상합니다. 요셉이 형통했다고 한다면 종의 자리에서 풀려나고 애굽에서 자수성가하여 성공했다고 할 때여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요셉이 종이 되고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형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보면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형통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는 ‘형통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아지고 억울함을 당하는 실패의 자리에서 성경은 그가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형통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진짜 실패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를 만난 요셉에게 필요했던 건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여전히 종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설상가상으로 누명을 쓰고 더 실패한 감옥의 자리로 내려간다 할지라도, 그럴수록 요셉은 더욱 살아났습니다.
기도 : 주님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