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과 사도의 가르침
본문 : 사도행전 2:40-42
요절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2절)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는 요절 말씀과 같이 순전히 영적인 활동들만의 모임이었습니다.
첫째, 가르침에 대해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갈망했던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이 모인 것은 같은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가르침, 같은 메시지를 믿었기 때문에, 같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특별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신약 초대 교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회심과 변화를 낳는 것은,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들을, 쓰고 말하는 것은 ‘무지’라는 죄입니다.
교회가 생겨나고 처음 몇 세기동안,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교부들은 공회와 종교회의로 모여 이것을 가려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사도의 교리와 가르침에 비춰 보았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아다나시우스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에, 똑같은 본질을 교리로 말합니다.
다른 가르침은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생명이 있고, 이 가르침에 점점 더 주리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들은 왜 가르침을 원했습니까? 자신들의 무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해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수 주제에, 자신이 구원자라고 한다며, 저 자를 없애 버리려, 십자가에 못 박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많이 알고, 다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장 모르는 자들의, 최악의 무지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스스로 낮아져, 모르는 줄 알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다 알고, 다 파악하고,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시킬 때, 왜 시키는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불순종한 적은 없습니까?
세 번째로 이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이 진리를 더 많이 배우고 싶어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새 영역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걱정되고 고민되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했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가 ‘글쎄요 잘모르겠는데요’라고 했다면, 아니면,‘ 우연의 일치’라고 대답한다면, 이들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구체적인 대답을 했고,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제 27 과 사도의 가르침
본문 : 사도행전 2:40-42
요절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2절)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는 요절 말씀과 같이 순전히 ⎕ㅇ적인 활동들만의 모임이었습니다.
첫째, 가르침에 대해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갈망했던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이 모인 것은 같은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가르침, 같은 메시지를 믿었기 때문에, 같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회심과 변화를 낳는 것은, ⎕⎕⎕ㄱㄹㅊ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들을, 쓰고 말하는 것은 ‘무지’라는 죄입니다.
교회가 생겨나고 처음 몇 세기동안,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교부들은 공회와 종교회의로 모여 이것을 가려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사도의 교리와 가르침에 비춰 보았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아다나시우스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에, 똑같은 본질을 교리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면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생명이 있고, 이 가르침에 점점 더 주리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들은 왜 가르침을 원했습니까? 자신들의 ⎕⎕ㅁㅈ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해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수 주제에, 자신이 구원자라고 한다며, 저 자를 없애 버리려, 십자가에 못 박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많이 알고, 다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장 모르는 자들의, 최악의 무지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스스로 낮아져, 모르는 줄 알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다 알고, 다 파악하고,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시킬 때, 왜 시키는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불순종한 적은 없습니까?
세 번째로 이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이 진리를 더 많이 배우고 싶어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들은 이제 새 영역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걱정되고 고민되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했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가 ‘글쎄요 잘모르겠는데요’라고 했다면, 아니면,‘ 우연의 일치’라고 대답한다면, 이들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구체적인 대답을 했고,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