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과 참된 반응
본문 : 사도행전 5:11-14
요절 :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신처럼 숭배될 때 이 일은 자신들이 하지 않았고 단지 도구요 통로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능력이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교회가 원할 때마다 기적을 일으키려 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그 능력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해 말씀 하실 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한들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기적을 통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쳐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람들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해 주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결코 불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는 부모의 충고는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지뢰 매설 지역이므로 출입금지라고 씌여 있는 표지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만족과 허세는 무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 표지를 보고도 자기는 상관 없다고 갈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도 하고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똥멍충이입니다.
단순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무가치합니다. 단순히 두려움이 주는 일이라고는 개선을 위해 각오하게 했다가 개선되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합니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무가치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과 여러분이 가야할 곳을 지시해 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셨기에 구주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구주라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눅 37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그러므로 두려움의 요소가 빠진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형벌이 있는 두려움이 아니라, 장차 올 진노를 피하게 해주는 두려움, 구주께 달려가게 만드는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기적만 보고 마는 것은 두려움만 느끼고 마는 것만큼 잘못된 일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교회는 인간이 만든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교회란 인간들의 착상에 의해 설립한 단체가 아니며 인간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첫 성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세상은 성령이 임하시고 사람들이 변화되고 건물이 진동하고 사람들이 엎드러져 죽는 세상이었습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크심과 영광스러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현대 세계는 얼마나 어리석고 피상적입니까! 우리는 지극히 왜소하고 제한적이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기사들은 하나님을 보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사실들을 진정으로 직면한 사람의 눈에는 예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과 똑똑한 머리가 전부 공허하고 불쾌한 가짜로 보이게 됩니다.
제 17 과 참된 반응
본문 : 사도행전 5:11-14
요절 :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이적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능력이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교회가 원할 때마다 기적을 일으키려 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능력은 하나님의 ⎕⎕ㅌㅈ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해 말씀 하실 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한들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기적을 통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쳐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ㄷㄹㅇ을 갖는 것입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람들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해 주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결코 불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는 부모의 충고는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지뢰 매설 지역이므로 출입금지라고 씌여 있는 표지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표지를 보고도 자기는 상관 없다고 갈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도 하고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똥멍충이입니다.
단순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무가치합니다. 단순히 두려움이 주는 일은 개선을 위해 각오하게 했다가 개선되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합니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무가치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과 여러분이 가야할 곳을 지시해 줍니다.
구주라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눅 37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그러므로 두려움의 요소가 빠진 그리스도인의 ⎕⎕ㄱㅎ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형벌이 있는 두려움이 아니라, 장차 올 진노를 피하게 해주는 두려움, 구주께 달려가게 만드는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ㅁㅇ으로 반응합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교회는 인간이 만든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첫 성도들이 살았던 세상은 성령이 임하시고 사람들이 변화되고 건물이 진동하고 사람들이 엎드러져 죽는 세상이었습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크심과 영광스러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현대 세계는 얼마나 어리석고 피상적입니까! 우리는 지극히 왜소하고 제한적이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기사들은 하나님을 보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