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과 기도에 힘쓰리라

본문 : 사도행전 6:1-4

요절 :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4절)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현대인들을 설득하고 싶다면 좀 더 지적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목회자를 찾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실한가 보다 점점 세상지식으로 듣는 사람들 수준에 맞는 이야기를 할 능력을 갖추는데 강조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성과 논리와 지각으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지성에 관심을 갖지말라’며 설교나 교리 공부는 이해하지 못하니 청중 수준으로 내려가서 신비와 열광하는 분위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접근법이 서로 완전히 반대인 것같지만 잘 들어보면 서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중들을 중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같은 방법이 과연 사도들의 방법과 같다고 여겨집니까? 사도들의 방법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들은 기도를 그렇게 강조했습니까?

첫째, 자신들의 무능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고 후에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도를 꼭 필요한 일로 필수적인 일로 생각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기도가 지극히 본질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지각이 필요해서 그것에 맞추어 인간적 방법으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지각을 구했습니다. 열정과 의지가 필요해서 매일 불을 받으려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성령께 의지하며 삶을 드려 기도했습니다. 지식이나 의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열심, 신비에 취하는 것과 지식을 의지하는 인간적인 태도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기도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와 기름부음이 필요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둘째,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가 어떤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있고, 하나님 다음으로 능력 있는 영적 세력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담, 모든 족장, 선지자, 모든 권세자들이 모두 쓰러졌던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새 메시지를 받았어도 이런 마귀의 능력에 맞서 싸울 신적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논증이나 증명으로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본성이 부패했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비틀리고 죄로 눈멀었기에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으로 학문으로, 또 다른 극단인 감성으로 노래로, 열광으로 다른 무슨 짓을 해도 인간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중생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조가 아니라 거듭남입니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 ‘위로부터’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어떤 결단을 내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무언가를 행하십니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능력을 불어넣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제 37 과 기도에 힘쓰리라

본문 : 사도행전 6:1-4

요절 :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4절)

오늘날 교회들이 목회자를 찾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실한가 보다 점점 세상지식으로 듣는 사람들 수준에 맞는 이야기를 할 능력을 갖추는데 강조점을 둡니다. 이성과 논리와 지각으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이들은 설교나 교리 공부는 이해하지 못하니 청중 수준으로 내려가서 신비와 열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같은 방법이 과연 사도들의 방법과 같다고 여겨집니까? 사도들의 방법은 “우리는 오로지 ⎕⎕ㄱㄷ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들은 기도를 그렇게 강조했습니까?

첫째, 자신들의 ⎕⎕ㅁㄴ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았고 후에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를 꼭 필요한 일로 필수적인 일로 생각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기도가 지극히 본질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지각이 필요해서 인간적 방법으로 하거나 매일 불을 받으려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성령께 의지하며 삶을 드려 기도했습니다. 자기 열심, 신비에 취하는 것과 지식을 의지하는 인간적인 태도가 잘못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와 기름부음이 필요했기 때문에 계속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둘째,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가 어떤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ㅁㄱ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능력 있는 영적 세력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담, 모든 족장, 선지자, 모든 권세자들이 모두 쓰러졌던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새 메시지를 받았어도 이런 마귀의 능력에 맞서 싸울 신적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의 본성이 부패해서 존재 자체가 비틀리고 죄로 눈멀었기에 철학으로 학문으로, 노래로, 열광으로 다른 무슨 짓을 해도 인간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중생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조가 아니라 ⎕⎕⎕ㄱㄷㄴ입니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 ‘위로부터’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어떤 결단을 내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무언가를 행하십니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능력을 불어넣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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