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과 잘못된 믿음
본문 : 사도행전 7:1-2
요절 :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2절)
이 설교는 스데반이 재판을 주재하던 대제사장 앞에서 한 법정 진술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스데반을 붙잡아 돌로 쳐서 죽였습니까?
첫째, 그들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살고 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는 한가지 암시가 흐릅니다. 그것은 그들은 잘못된 점이 있을 뿐 아니라 나사렛 예수와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결핍이 있고, 그것을 채울 분은 예수 한분뿐임을 암시한 것이 유대 지도자들을 격분하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자신들이 믿는다고 한 것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족보를 되짚어서 아브라함의 혈통이면 만사가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관계도 좋고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 특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기계적인 예배 개념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규칙적으로 다니며 규정된 예물만 드리기만 하면 신자로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을 떠나신 까닭에 예배에 몇 명 출석하고, 행사가 성공적이었냐는 문제만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셋째, 자신들이 율법을 받은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더 이상 바랄 것도 노력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망 역시 주님께서 이미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마 521-22에서 스스로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라도 형제에게 욕했다면 너희는 살인자다. 스스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라도 음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았다면 이미 간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의 의미나 그분에 관한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심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자신들의 종교와 율법의 성취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지금까지 인도 받은 모든 길의 종착점이요 완성임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편견과 인간적 생각에 철저히 눈 멀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이미 하나님과 화목했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그만큼 멀어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을 얼마나 크게 의존했는지 앞에서 살펴 보았는데 오늘날 우리들도 복음 자체보다 내가 관념으로 여기며 따르고 있는 무엇인가교회출석하고 있다, 어떤 성경공부를 했다, 잘 가르치는 유명한 목사님께 배웠다, 오래전에 받은 직분으로 많은 경험들을 쌓았다. 어떤 큰 선교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 영성훈련을 얼마나 받았다를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2절‘들으소서’ 귀 기울여 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잠히 인내하며 들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은 거친 논증이고 진술입니다. 기독교는 이성적으로 대상을 생각하고 논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점이 부족하니까 기독교를 감성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는 냉정을 되찾고 경청하라고 말합니다. 긴장하고 들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사상에 먹히고 삶은 매우 협소해집니다. 우리의 에너지가 들고 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왜냐면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으소서’라는 말에는 이것은 그들이 익히 알지만 바로 알지 못했던 사실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에 귀담아 진지하게 들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모두 씻어 냅니다.
제 40 과 잘못된 믿음
본문 : 사도행전 7:1-2
요절 :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2절)
이 설교는 스데반이 재판을 주재하던 대제사장 앞에서 한 법정 진술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까?
첫째, 그들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살고 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에게 큰 결핍이 있고, 그것을 채울 분은 예수 한분뿐임을 암시한 것이 그들을 격분하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자신들이 믿는다고 한 것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면 만사가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관계도 좋고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자신들의 ⎕⎕⎕⎕ㅇㅈㅅㅌ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기계적으로 성전에 다니며 규정된 예물만 드리기만 하면 신자로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그들을 떠나신 까닭에 예배에 몇 명 출석하고, 행사가 성공적이었냐는 문제만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셋째, 율법을 받은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더 이상 바랄 것도 노력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마 521-22에서 ‘스스로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라도 형제에게 욕했다면 너희는 살인자다. 스스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라도 음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았다면 이미 간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종교와 율법의 성취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지금까지 인도 받은 모든 길의 종착점이요 완성임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ㅍㄱ과 인간적 생각에 철저히 눈 멀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그만큼 멀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복음 자체보다 내가 관념으로 여기며 따르고 있는 무엇인가교회출석하고 있다, 어떤 성경공부를 했다, 잘 가르치는 유명한 목사님께 배웠다, 오래전에 받은 직분으로 많은 경험들을 쌓았다. 어떤 큰 선교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 영성훈련을 얼마나 받았다를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2절‘들으소서’ 우리는 잠잠히 인내하며 들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성적으로 대상을 생각하고 논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점이 힘드니까 기독교를 감성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긴장하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에너지가 들고 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왜냐면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모두 씻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