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과 생각의 출발점

본문 : 사도행전 7:1-2

요절 :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2절)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점에서 완전히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항상 먼저 하는 일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이 지적한 각론들에 곧장 답하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 전체 역사를 바라보게 한 다음 적용에서 자기에게 제기된 고소들을 답변했습니다.

  1. 기독교 설교란 개념 전달이 아닙니다. 복음이 지닌 구원은 교훈에 있지 않고 단연코 역사 사실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주로 역사 사실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실제로 발생한 사건과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에 기록된 사건과 사실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이 사건들이 기독교 신앙에 구원과 직결됩니다.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신약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둘의 관계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장차 이루어질 복음에 대한 예언과 준비를 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이 성취된 것을 봅니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할 수 없도록 연관되어 있습니다.

  1. 역사를 강조해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현세의 삶에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인간 삶 전체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역사 전체를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복음을 배제하고는 문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곧장 돌아가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역사의 전모를 바라보지 않고는 현대세계와 그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중요성과 문제들에 골몰하기 전에 먼저 눈을 들어 전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 역사를 강조해야하는 세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도덕적 혹은 윤리적 문제들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복음은 ‘예수께로 오라’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은 그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시작은 ‘영광의 하나님’로 시작합니다.

복음은 인간과 인간의 문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자신들로 시작해 자신들로 끝마칩니다. 늘 자기 중심이고 자기 위주로 돌아갑니다. 과대망상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마 2236-39 현대인들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해 몰두합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어떻게 상하지 않으며, 비위를 맞추고, 그에게 좋은 나의 이미지를 유지할까하여 진리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그것으로 출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둘째 계명이다.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곧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영광’이 무슨 뜻입니까? 장엄함, 위대함, 경이로움, 권능을 뜻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류와 초월적으로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창조와 자연에, 역사 안에서 행동하심으로 계시, 섭리로도 스스로 계시, 예언을 통해서도, 스스로 영광을 알게 하는 직접적인 계시를 주기도 하셨습니다.

제 41 과 생각의 출발점

본문 : 사도행전 7:1-2

요절 :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2절)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점에서 완전히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항상 먼저 하는 일은 ⎕⎕ㅇㅅ가 주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과거로 돌아가 전체 역사를 바라보게 한 다음 적용에서 자기에게 제기된 고소들을 답변했습니다.

  1. 기독교 설교란 개념 전달이 아닙니다. 복음이 지닌 구원은 교훈에 있지 않고 단연코 역사 사실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주로 역사 사실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실제로 발생한 사건과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에 기록된 사건과 사실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이 사건들이 기독교 신앙에 구원과 직결됩니다.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신약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둘의 관계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은 장차 이루어질 복음에 대한 예언과 준비를 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이 성취된 것을 봅니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1. 역사를 강조해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현세의 삶에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역사 전체를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복음을 배제하고는 문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곧장 돌아가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역사의 전모를 바라보지 않고는 현대세계와 그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중요성과 문제들에 골몰하기 전에 먼저 눈을 들어 ⎕⎕ㅈㅊ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 역사를 강조해야하는 세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도덕과 윤리 문제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2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복음은 ‘예수께로 오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시작은 ‘영광의 하나님’로 시작합니다.

복음은 인간과 인간의 문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자신들로 시작해 자신들로 끝마칩니다. 늘 자기 중심이고 자기 위주로 돌아갑니다. 과대망상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마 2236-39 현대인들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해 몰두합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어떻게 상하지 않으며, 비위를 맞추고, 그에게 좋은 나의 이미지를 유지할까하여 진리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그것은 둘째 계명이다.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곧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인류와 초월적으로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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